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브론 제임스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농구 역사상 최고의 [[유망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ollywoodchicago.com/FabFive.jpg|width=100%]]}}}|| 그런 르브론의 딱한 사정을 눈여겨 본 것이 초등학교 미식축구부 친구의 아버지인 프랭크 워커였다. 애크런 주택관리국에서 일하던 워커는 글로리아가 생활 기반을 마련하는 동안 르브론을 키워주기로 했다. 르브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경험했고, 워커의 다른 세 자녀와 함께 가정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르브론은 [[개근상]]을 타는 [[모범생]]으로 바뀌게 되었다. 워커의 아내인 팸 워커는 글로리아에게 임대 주택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르브론이 [[농구]]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워커는 그를 농구 학교에 보내 제대로 농구를 배우게 했고[* 조던이 르브론을 막는 방법에 대해 "르브론은 왼쪽으로는 돌파 안 하니까 나는 르브론을 왼쪽으로 몰아서 슛하게 만들겠음." 이라고 말했는데, 르브론은 여기에 대해 "워커 선생님이 나에게 왼손 레이업을 가르쳐 주었다." 고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후 올랜도 원정 경기에서 깨끗하게 왼쪽 돌파로 위닝샷 성공.], 르브론은 여기서 시언 코튼, 드루 조이스 3세, 윌리 맥기 등의 친구들과 동향 출신인 키스 댐브럿[* 1958년 10월 26일 유대계 미국인이자 듀케인 대학교 시절 농구선수이던 아버지 [[https://www.beaconjournal.com/obituaries/0001036217-01|시드 댐브럿(1931~2021)]]과 애크런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어머니 페이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사촌 어윈(1928~2010)은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 재학 시부터 농구선수로 활약하여 1950 NBA 드래프트 때 뉴욕 닉스에 전체 7번으로 지명되었으나 컬럼비아 대학교 치과대학에 재학했는데, 1951년 CCNY 재학 시절 발생한 점수 조작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키스 댐브롯 자신은 파이어스톤 고등학교 때 야구와 농구를 즐기다가 애크런대 진학 후 경영학을 전공하며 야구부에서 3루수로 뛰었고, 1984년 동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까지 땄다. 1984년 NCAA 디비전3 대학인 티핀 대학교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해 1986년 이스턴 미시건 대학교 코치로 전근가서 벤 브라운 감독을 3년 간 보좌했고, 이후 애시랜드 대학교(1989~1991), 센트럴 미시간 대학교(1991~1993)를 각각 거쳤으나 1993년 마이애미 대학교(오하이오)와의 대결 전에 인종 차별적인 발언 논란으로 센트럴 미시건대에서 쫓겨났다. 한동안 고향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와 일부 썸머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1998년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감독으로 현장 복귀해 3년 동안 맡았고, 2001년 모교 애크런대 코치로 전근간 후 댄 힙셔 감독을 보좌하다가 2004년 감독으로 승진하여 임기 13년 동안 NCAA 전국대회 진출 3회, NIT 진출 5회, CBI 진출 1회, CIT 진출 1회 등을 각각 일궈냈고, 2017년 듀케인대로 옮겨 현재도 재직 중이다.], 드류 조이스 2세 등 훗날 고등학교 은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Fab4라고 스스로를 부르던 르브론과 친구들은 점차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AAU(Amateur Athletic Union) 8학년 이하 대회에서 결승까지 진출하는 활약을 했지만 결국 67-68로 아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르브론은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SVSM)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애크런에서 농구 잘하는 흑인 학생은 부틀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부틀에서는 초단신이었던 드루 조이스 3세를 받는 것을 거절했고, 친구와 계속 농구를 하고 싶었던 르브론은 조이스 3세가 SVSM 입학을 결정하자 미련없이 부틀 입학을 포기했다. 주로 가톨릭계 백인들이 다니던 SVSM은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학교였지만 농구에서는 완전히 무명이었다.[* 여담으로 이때 SVSM 농구부 주장을 맡고 있던 사람이 현재 르브론의 매니지먼트 회사 CEO인 매버릭 카터다. 카터는 어린 시절 르브론의 이웃집에 살면서 서로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Fab4는 빈센트-세인트 메리를 1984년 이후 처음으로 주 챔피언으로 이끄는 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활약을 하며 지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점점 몸이 자라던 르브론의 기량은 이미 고등학생을 초월한 수준이었고, 시합 중에 비트윈더렉 덩크를 작렬시킬 정도였다. 그는 3년이나 연속으로 오하이오 주의 미스터 배스킷볼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싹수가 보였다. NBA의 전설 중 하나인 [[빌 월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우승 멤버이며, 다재다능한 것이 특징인 센터]은 르브론 제임스가 한창 고등학교에서 뛸 시기에(졸업시즌이 아닌) 그의 경기를 보고 '''"저 아이는 지금 당장 NBA에 가도 주전으로 뛸 수 있다."''' 라고 칭찬했다. 실제로 슬램매거진 표지를 장식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받을 수 있는 상이란 상을 다 휩쓸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2.cdn.turner.com/lebron-james-cover.jpg|width=100%]]}}}|| '''친구와 함께하기 위해 농구 명문을 포기하고 무명 팀에 입학하여 그 팀을 전국 최강으로 만드는 만화 같은 이야기'''에 언론의 주목도는 엄청났다.[* 훗날 르브론이 디시전 쇼를 통해 빅3를 결성한 것에 대한 반감이 컸던 이유는 물론 쇼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컸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이클 조던처럼 본인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량 면에서만 조던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실력과 배경 모든 면에서 엄청난 슈퍼스타의 탄생이 예고되어 있었던 것.] 이렇게 르브론은 고등학생 때부터 어지간한 프로선수들 정도의 관심을 받았다. [[코비 브라이언트]]나 [[마이클 조던]]도 르브론에 관한 코멘트를 했으며, 오크힐 학교와 치른 경기는 13년 만에 고등학생 농구 시합이 미전역으로 방송될 정도였다. 르브론의 고등학교 시절은 유례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했는데, 그는 사상 최초로 2학년으로서 미스터 배스킷볼[* Mr. Basketball은 공신력있는 미국 언론들이 지정하는 주별 MVP를 지칭하며, Mr. Basketball USA는 전국 MVP이다. 대학농구와 마찬가지로 미국 고등학교 농구에선 공신력 있는 MVP상이 여러개가 있는데, 이 중 하나가 Mr. Basketball이다.]에 선정되었고, 고작 2학년의 신분으로 USA 투데이가 선정한 All-USA 퍼스트팀에 올랐으며, 3학년 때는 [[게토레이]]가 선정한 전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는데 이것 역시 3학년으로선 역대 최초이다. 최종적으로 고등학교 4년 동안(미국은 보통 4년제이다) 르브론은 오하이오주 미스터 배스킷볼 3회, 전미 미스터 배스킷볼 2회, 전미 올해의 선수상 2회란 말도 안되는 업적을 세웠다.[* 맥도날드 올스타 게임만 참가 1회인데, 이건 당연한 것이 원래 맥도날드 게임은 졸업반 선수들만 초청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당연한 듯이 MVP를 수상했다.] 이를 감안하면 위 월튼의 멘트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당시는 한해에 몇 명씩 고졸 NBA선수가 배출되던 시기이므로 전미 MVP에 선정되지 못한 선수들도 다수 NBA에 직행하곤 했다.[* 실제로 1996년 전미 미스터 배스킷볼은 [[마이크 비비]]였는데, 2위였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대학을 포기하고 NBA드래프트에 참가해 뽑혔다. 즉 초고교급 선수였던 코비도 못 받은 상이란 것. 참고로 미스터 배스킷볼이나 위에 언급된 올해의 선수상은 유망주로서 평가가 아니라 해당 선수의 고등학교에서 성과만 놓고 주는 것이다. 이는 올해의 대학선수상도 마찬가지. 코비가 유망주로서 평가가 비비보다 낮았기 때문에 상을 놓친 것이 아니다.] 즉 전미 MVP에 뽑혔다면 NBA급 유망주란 것을 입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월튼이 이 멘트를 남긴 것은 2002년에 당시 3학년이던 르브론의 경기를 중계했을 때였는데, 이때 르브론은 키가 이미 6피트8인치로 1년 뒤 드래프트됐을 당시와 키가 같았다. 즉 월튼이 봤던 '3학년 르브론'은 이미 203cm에 근육질 체형인데다 압도적인 전미 최고의 고등학교 선수였다는 것이니 NBA에서 뛰기 충분한 실력이었으며, 팀구성에 따라 주전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미국에서는 같은 학년이라도 나이차이가 조금 나는 경우가 있는데, 르브론이 졸업한 2003년은 84~85년생들이 졸업하던 해였다. 실제로 르브론과 같은 84년생이고 생일도 3개월밖에 차이나지 않는 라샤드 매캔츠는 전 해인 2002년에 졸업해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같은 고졸이라도 나이차이가 나는게 이 때문이다. 미국 아이들은 보통 6세 생일이 지난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에 1990년 12월에 6세가 된 르브론이 1991년에 입학한 것인데, 만약 르브론의 어머니가 그를 90년에 입학시켰다면 (만5세라도 입학이 가능하다) 르브론이 2002년에 드래프트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위에서 설명했다시피 2002년에 3학년 르브론은 이미 NBA입성이 가능하고도 남는 초특급 유망주였다) 당시 드래프트 나이기준은 '드래프트가 열리는 해에 18세 생일이 지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론 아직 17세인 선수들이 드래프트되기도 했었기 때문. 그랬다면 12월생인 르브론은 역대 최연소 NBA선수가 됐을 것이다.] 워낙 매스컴의 관심이 폭발하다보니 위기도 있었다. 2003년 제임스의 어머니 글로리아가 제임스의 18번째 생일 때 Hummer H2를 선물로 주었고,[* 자동차를 사준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당시 글로리아의 신용등급으로는 받을 수 없는 액수의 대출을 받아 차를 구입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은행으로서는 머지 않아 백만장자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르브론의 미래 가치를 고려해 대출을 해 준 것. 더군다나 이 시절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이라서 대출이 워낙 쉬웠기 때문에 이 정도면 매우 합리적인 대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선수가 100달러 이상의 선물을 받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규정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있었다.] 제임스 자신도 고가의 저지를 선물로 받아서 제명당할 위기에 처하긴 했지만, 다행히 2게임 결장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화려한 고교시절을 보낸 제임스는 졸업할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함께 한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지만, 워낙에 초월적인 기량을 가지고 있던 르브론은 더이상 어머니를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해서 2003년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03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고향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지명되면서 르브론은 NBA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